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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스리랑카 여행

강렬한 이야기와 예술로서의 유적, 풍경이 함께하는 시기리야




담불라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가량 달려 시기리야에 도착했다. 담불라의 락템플에 올라서도 시기리야락이 보였는데 생각보다 꽤 걸렸다. 우리집에서도 북한산이 잘 보이지만 30분이상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기리야는 우뚝 솟은 바위산 때문에 주변 나무로 시야만 가리지 않는다면 길을 잃어도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차장이 내리라고 해서 내린 곳에는 Flower inn guesthouse와  맞은편에 nilmini lodge가 있었다. 플라워인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니 조금 기다리라고 해서 앉아있다가 다른 데 먼저 확인해 볼 겸 나와 닐미니 롯지로 향했다. 닐미니 롯지에 가니 1400루피라고 했다. 화장실도 안에 있고 와이파이도 잡혔다. 아침포함 가격이어서 바로 체크인했다. 근데 와이파이를 쓰려고 하니 300루피를 따로 내야한다고 했다. 다행히 와이파이는 괜찮은 속도로 안정적으로 잡혔기 때문에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숙소에서 시기리야락은 가깝다. 걸어서 10분이면 south gate에 도착하는데 바위산을 오르려면 main entrance로 들어가야 하기에 입구까지 10분을 돌아 걸어가야 했다.







시기리야에서 우뚝 솟은 바위산 위에 폐허가 된 궁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정글 속 우뚝 솟은 바위 산 그 위의 폐허가 된 궁전이라는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게다가 그 길에 천년이 넘은 그림들이 있고 이 곳이 생긴 이야기도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하다. 단 11년간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이 곳은 카사바 1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왕이 1세라는 건 이전의 왕의 전통성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카사바 1세는 아버지인 다토세나 왕을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이고 왕이 되었다. 동생인 모갈리아나 왕자의 재산을 압류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 위에 앉았지만 동생이 복수를 할 꺼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카사바는 결국 바위산 위로 수도를 옮기고 궁을 짓기 시작했다. 굉장히 협소하고 가파른 곳이여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도의 기능을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곳이다. 전쟁 중 최후의 투항을 위해 올라갈만한 곳이다. 게다가 이런 곳은 한 번 둘러쌓이면 물자 공급이나 탈출이 불가능하니까 꼼짝 없이 죽는 거 아닐까?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더니 기껏 왕이 되었지만 평생 불안해하며 살았던 것이다. 







십여년이 흐른 뒤 그의 동생 모갈리아나 왕자는 인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왔다.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지만 짧은 시간만에 동생의 승리가 끝났다. 카사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시기리야락으로 향하는 길은 앙코르와트처럼 해자로 둘러쌓여있는데 네방향 모두가 쌓여있는 건 아니다. 카사바 왕은 이 해자에 악어를 풀어 놓아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입구쪽에 박물관이 있다.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독특한 건 박물관이 물 위에 지어져있다는 거다. 입장권을 샀는데 시기리야 다음에 폴론나루와를 갈 생각이어서 결국 트라이앵글 티켓을 사고 말았다. 5000루피가 넘었다. 여러 도시의 다양한 곳을 한번씩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갈 때 종이를 찢고 뒤에 도장을 찍는다. 정말 많은 유적지가 표시되어있는데 아마 절반도 안 쓸건데 괜히 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패키지 티켓으로 사면 귀찮거나 순간 입장료로 갈등할 일이 없어지고 부지런히 다니게 되니 잘한 거라고 위안을 가져보았지만 스리랑카 여행이 끝나고 계산해보니 너무 늦게 사서 결국 이 때부터 각각 티켓 내고 사는 게 더 쌀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시기리야 유적지

7:30am - 5:00pm 쉬는 날 없음


시기리야 박물관

8:30am - 5:30pm 매달 첫째 월요일 쉽.


입장료

외국인 25달러(싱글) 50달러(라운드 트립) / 스리랑카인 50루피 

* 라운드 트립은 시기리야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이다.







본격적으로 오르막에 오르기 전 평지와 낮은 곳에도 많은 유적지가 있는데 그리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평지 쪽에는 벽돌을 쌓아서 만든 공간들이 보이고 조금씩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하면 큰 바위를 평평하게 깍아서 의자와 난간을 만든 곳도 있다. 항상 쪼리를 신고 다녔는데 가파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오르막이 시작되고 운동화신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만한 산이 아니라 거의 수직으로 계단을 올라간다고 생각해야한다.







시기리야 락은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거울벽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거울벽 초입에서 철제 계단을 오르는 곳이 나온다. 벽화를 보기 위해 그곳을 올라갔다 내려오게 된다. 사진에서도 벽화의 색이 바래는 것을 막기 위해 천막이 씌워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거울벽을 지나면 사자 발톱이 나오고 그 위로 절벽에 쇠심을 박아 만들어놓은 계단을 오르면 폐허가 된 왕궁에 도착하게 된다.






조금 올라 지나 온 길을 바라보면 이런 모습.






거울벽이 나오고 그 초입에 이제 벽화를 보기 위해 이런게 된 곳을 오르는데 아무래도 불안 할 수 밖에 없다. 절벽에 쇠심을 박고 철제 계단을 놓았다. 스리랑카의 기술력은 믿을 수 있는 걸까. 녹이 안 쓴 곳이 없고 부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올라가면 된다.







거울벽(Mirror wall) 예전에는 얼굴이 비칠 정도로 투명(?)해서 거울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7세기에서 19세기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낙서가 남아있어서 스리랑카의 언어를 연구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싱할라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글들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시설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 풍화되어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지금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아예 그냥 반질반질해질 것 같다. 












절벽에 그려진 여인들은 시기리야 레이디 Sigiriya lady로 불린다. 카사바왕 때 그려진 것이니 1500년이 넘은 셈이다. 절벽에 그려져 있는데 천년이 넘은 시간동안 어떻게 빛이 발하지 않았는지 신기하다. 비도 맞고 바람만 1500년동안 맞아도 온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신기하다.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1875년 한 영국인이 망원경으로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지금은 절벽에 계단이라도 만들어좋았지만 당시에는 어떻게 여기에 그림을 그렸을까? 이건 기어올라가서 그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밧줄에 매달린 채 그려야 하는 곳이다. 그림이 그려진 이야기도 굉장히 아이러니다. 카사바왕이 자신이 살해한 부왕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시대에 부모가 죽고 3년동안 시묘살이 하는 것처럼 정말 부질없어 보인다. 심지어 카사바왕이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는가. 그냥 왕자로써의 삶이 더 행복했을 것 같다. 물론 왕자라는 위치가 언제나 죽음과 직면해 있기에 왕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으니 실제 당시 카사바왕이 어떤 상황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지 알아야할 것이다. 







현재는 18개 정도의 벽화만 남아있는데 예전에는 50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막을 쳐 두었다. 사진촬영도 플래시를 터뜨려서는 안된다. 오랜시간 이런 색을 간직한 채 유지되고 있고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던 기간만큼 지속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뭐, 복원하면 되긴하겠지. 벽화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철판 아래와 왼쪽의 천막 바깥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라는 것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면서 벽화를 구경한다.






이 장소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미술관에 걸려있어도 눈길이 가는 그림은 더욱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녀는 옷을 입고, 귀족은 벗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당시의 스리랑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같다. 






















시기리야락을 대표하는 것은 벽화와 이 사자발이다. 우습게도 정작 정상에 있는 왕국은 이미 폐허가 되어 이곳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지 못한다. 이 사자발이 정상에 있는 왕궁의 입구다. 과거에는 온전한 움크리고 있는 온전한 사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발을 지나 다리, 머리로 올라가 사자 입 속으로 들어가면 왕궁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모습은 정말 엄청났을 것 같다. 시기리야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곳에서 생겨났을 것을 본다. 싱하는 사자를 기리얀은 산을 의미하는데 시기리야는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사자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단이 놓여있지만 계단 주위를 보면 이 가파른 바위에도 홈이 보인다. 과거에는 이 길로 오른 건가?! 그럼 왕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도 이 길로 다녔다는 건가? 무녀진 사자상의 상반신에 계단이 있었을 것 같다. 사자발 사이에 있는 계단처럼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다가 궁전을 짓다니 정말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상에 남아있는 궁전을 흔적은 정말 말 그대로 바닥에 기초공사 한 것마냥만 남아있다. 동생인 목갈라나 왕자가 전투에서 이긴 후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옮기도 이 곳은 승려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왕궁이 드러서기 전 이 주변에는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제 정신인 왕이라면 당연히 이곳은 왕궁이 아닌 사원으로 어울리는 곳이니까. 근데 짧은 시간만에 망한 왕조의 중앙에 드러선 사원은 오래가지 않았고 근대에 재발견되기 전까지 이곳은 정글 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산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멋지다.









PALACE......

























나갈 때는 메인 입구를 이용하지 않고 바로 south gate로 바로 갔다. 계단 근처에 왕벌집이 있다. 땅으로 내려와서 보니 머리에 죽은 왕벌이 있었다. 지나가는데 툭툭기사가 불러서 가니 머리에서 그걸 떼어줬다. 박물관 인포메이션에서 얻어 온 지도는 주변 숙소들과 사진 찍기 좋은 곳도 표시되어있어서 그 중 한 곳인 sigiriya wewa로 향했다. 동네가 작아서 남쪽 문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걸렸다. 연못과 함께 시기리야락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포스팅의 첫번째 사진이 거기서 찍은 것이다.





▼ 닐미니 롯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