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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쟁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저주

 

리무쟁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저주

 

1944년 6월 10일, 세계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프랑스 리무쟁에 있는 작은 마을 오라두르 쉬르 글란에서 기관총과 수류탄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교회가 불탔다. 화염이 잦아든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곳엔 642구의 시신과 두세명의 사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게다가 어린이가 207명이 포함되어있었고 전쟁에 참전한 남자들 때문에 여자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나치 무장친위대였다. 폐허가 된 마을의 사진은 과거에 찍은 것이 아니다. 2013년 현재도 이런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전쟁에 대한 경각심과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대로 남겨두었다.

 

 

1944년 6월이면 이미 독일에게는 패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45년 4월 히틀러가 자살하기까지 채 1년이 남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나치의 SS무장친위대도 스페인에서 철수하고 있던 중이었다. 프랑스 리무쟁 지방의 오라두르쉬르글란에 도착한 나치는 먼저 남자들을 헛간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 후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교회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굳게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다. 그렇게 끔찍한 대량학살은 이루어졌다.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자 전쟁범죄를 일으킨 독일 군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 전번재판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끔찍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일으킨 장교들은 아무도 재판을 받지 않는다. 왜일까? 그건 이미 그들이 모두 1년도 남지 않은 전쟁에서 모두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들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대가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 프랑스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이 폐허가 된 마을 근처에 전쟁후에 만들어졌는데 2천명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폐허가 된 복원되지 않은 오라두르쉬르글란은 현재 세계 10대 폐허도시 중 하나로 꼽혀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폐허도시 1위는 오랫동안 체르노빌이 지키고 있다.

 

 

 

 이 학살에 대한 전범재판에 관련된 흥미로운 글이 담긴 책이 있어서 일부를 그대로 퍼왔다.  

출처 비시 신드롬(1944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는 과거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 앙리 루소 저 / 휴머니스트 출판

 

 

1953년 1월 12일 보르도 군사법정에서 전범재판이 열렸다. 제 3국 SS사단 소속 군인 21명이 나치의 군사적 야만 행위의 상징이던 범행을 심판받기 위해 피고석에 앉았다. 이들이 바로 오트비엔느 도의 오라두르쉬르글란 촌락 주민 642명을 학살한 장본인들이었다. 기소된 군인들 중에는 2명의 하사관과 공범만 있을 뿐 장교는 1명도 없었다. 이 재판은 전쟁 범죄와 관련하여
점령군이 자행한 수많은 범죄를 재판하는 일상적인 재판이 다시 한번 진행되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만 전국적 드라마로 바뀌고 말았다. "우연 혹은 고통스런 모순"이라고 장 피에르 리우는 적고 있다. 21명의 피고 중 14명이 알자스 출신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12명은 SS친위대에 강제징집되었고 1명은 자원입대했으며 나머지 1명은 신분이 불확실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실제 엄청나게 복잡했다. 우선 사법적인 관점에서의 복잡성이다. 나치친위대를 탈영하여 비시 정부에 의해 고소되었던 대부분의 알자스 청년들은 FFI나 FFL에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뒤 당연히 이들은 면소 판결을 받았다. 1953년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도 하고 자신들이 겪은 악몽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범죄의 경우 집단 책임 원칙을 적용하는 1948년 9우러 15일 소급법의 적용을 받아 재판정에 인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