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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울주 여행] 못 다한 이야기 - 3일간의 소소한 마주침

 


 울주 여행을 다녀와서 많은 사진과 글로 블로그를 채웠는데도 아직 카메라 속에 남아있는 사진들이 많았다. 보고자 하는 곳에 가는 '사이'에 우연히 보게 된 곳들에 대한 사진들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보자니 충분하지 않을 것 같고 정리해두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은 '사이'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그 못 다한 이야기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하나 하고자 한다. '사이'의 공간 또한 매력적인 공간들이다. 이 포스팅에서 다룰 '사이'의 공간은 작천정, 인내천 바위, 3.1 독립운동 사적비, 언양 지석묘, 복순도가 손막걸리, 언양향교, 언양시장, 진현마을이다.



 


 작천정은 작괘천의 너럭바위 위에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의 누각 건물이다. 이 곳은 고려말 유배온 고려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글을 읽던 곳이라 전한다. 건립유래는 고종 31년(1894년)에 언양현감으로 온 정긍조가 1895년 봄에 이 작천정 자리에서 시회를 열고 정각짓기를 주청하였으며 1899년 울산군수로 온 최시명이 1900년 가을에 착공하여 1902년 여름에 준공하고 작천정이라 명명하였으며 현판의 글은 서예가 김성근이 썼다. 1944년에 작천정보존회가 조직되어 중수하였으며 1955년 중건 및 1967년 중수하여 관리해 오다 2005년 울주군에서 현재와 같이 중건하였다. 너럭바위에는 여러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시회 우수작 및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는 '모은대'와 울산의 여류 시인인 '이구소'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아쉬운 것은 바로 옆에 식당 하나가 붙어 있는데 이 작천정이 마치 이 식당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괘정에서 작괘천을 따라 내려오는데 인내천 바위 안내판이 보였다. 3분 정도 산 위로 올라가면 바로 인내천 바위가 있다. '인내천'은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평등사상, 인권종중의 사상으로서 100년 전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있던 시대에는 허용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이 '인내천' 바위는 1915년 울주군 상북면 출신 김영걸씨가 글씨를 쓰고 삼남면 출신 함석헌 선생이 음각대자로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일대는 언양지방 "3.1독립운동사적비"와 함께 암울하고 격동적이었던 우리의 근대사에 인동초같은 국민들이 구국을 위한 하나된 마음의 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1 독립운동 사적비는 언양시내에 서 있다. 위의 인내천 바위와 묶여서 언급되어있는 것을 봤는데 시내로 오자마자 보니 왠지 반가웠다. 삼일정신은 대화합의 정신, 민족자주의 정신, 애국애족의 정신, 광명정대한 정신 및 인류공영의 사상 등이다. 울산은 3곳(언양,병영,남창)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터졌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이 언양지역이다.


 

 


언양 지석묘(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는 오영수 문학관 길 건너에 있어서 들르게 되었다. 지석묘는 쉽게 말해 고인돌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봤는데도 언양 지석묘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껏 본 지석묘 중에서 가장 컸다. 이렇게 큰 지석묘도 있구나 싶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이라 하여 구분한다. 울산지역에서는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주로 분포하고 있다. 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며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6매로 된 받침돌의 크기는 2.8m ~ 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언양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남사를 오가다가 손막걸리를 보았다. 울주 여행을 와서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언양 불고기였다면 가장 마시고 싶었던 것이 복순도가 손막걸리였다. 울주군 특산물과 울주군 여행 안내책자에 나와있었다. 울주전통주로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건배주로 채택되기도 했다. 영남알프스 맑은 물에서 재배된 무농약 상북 오리쌀로 빚은 우리나라 대표 전통주 손막걸리다. 박복순 장인이 숙성과정에서 병입 후 온도차를 이용한 반복숙성의 방법을 개발해 탄산의 농축을 극대화한 청량감 최고의 막걸리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동영상을 볼 수 있는데 병을 개봉할 때 탄산의 힘으로 병 밑의 침전물이 뭉게구름같이 피어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샴페인 같은 막걸리여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마신다고 한다. 그래서 핵안보정상회의에 사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양시내에서 언양불고기를 먹고 시내를 어슬렁거리는데 독특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 한마리가 도도하게 걸어가더니 치킨집 안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간절한 눈빛을 쏘고 있었다. ㅋㅋ 지나가면서 슬쩍보니 안에서는 사람들이 치킨을 먹고 있었다. 자주 오는 녀석인지 그러려지 하고 보더라. ㅎ 얼마나 맛있으면 저럴까 싶어 결국 나도 저녁에 처갓집 치킨 한마리 사서 숙소로 향했다. =ㅁ=



 


 언양향교(울산광역시 유형문화제 제8호)은 본래 반월산 아래에 있었으나, 1696년과 170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지금 장소로 옮겨 세웠으며, 그 후 두 번 고쳤다. 향교는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지방 교육기관이다. 향교 건물은 문묘와 학당으로 이루어진다.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성, 이현과 우리 나라 십팔현을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고, 학당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다. 언양향교는 일반적인 지방향교의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성전 축과 명륜당 축이 어긋나 있고, 동서무가 없으며, 서재 자리에 존경각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인 겹처마 익공 양식의 맞배지붕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익공 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언양시장 2일, 7일이 장날로 장날이 아니어도 시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 건물 내 먹거리 식당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이 특히 인기가 좋아보였다.




 


 진현마을은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에 지나가게 되는 마을이다. 국도를 빠져나오 반구대 향하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데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잠시 마을을 둘러보았다. 옆에 보리밭이 있었는데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보리밭은 꽤나 멋졌다.


 


 진현마을은 역사가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뭐... 근처에 반구대 암각화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지난 2003년 진현마을에서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곳 진현마을 주변지역은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이 지하에 묻혀 있었음이 도로확장공사의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북쪽구릉 경사지에서 확인된 2동의 집자리는, 평면형태가 장방형 또는 정방형 움집으로써, 6개의 기둥 구멍을 확인하였다. 집자리 내부시설은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와 벽 가장자리를 따라 얕은 도랑이 돌려져 있고, 화덕은 난방 또는 취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며, 도랑은 외부로 돌출된 배수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배수구가 붙어 있는 집 자리 구조형태는 울산지역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구조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된 유적지의 집 자리에서는 출토된 민무늬토기와 곡식을 갈 때 사용하던 갈판, 돌도끼, 돌창 등은 기원전 7~8세기의 청동기시대 유물으로써, 지형적으로 마을의 규모는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시기에 반구대 암각화를 만든  집단이 살았던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