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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울주 여행] 임진왜란의 아픈 역사, 조선에 세워진 일본의 성 서생포왜성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거려서 사진으로 보았던 명선도 뒤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없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해수욕장에서 바다와는 반대편에 보이는 산에 있는 서생포왜성(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으로 향했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에서 1593년쯤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서 지어졌다. 16세기 말의 전형적인 일본식 평산성(평지성과 산성의 쌓는 법을 아울러 벌판과 산을 이어 쌓은 성)이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에 내성을 쌓고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단, 3단의 부곽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 산 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외성을 배치하였다. 성벽 밖에는 2, 3중으로 호를 둘렀다.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는 서생포 뿐 아니라 순천, 부산 등 경상남도 일대에 30여개에 이르는 왜성이 있는데 이들 왜성 중에 가장 웅장하다. 현재 산정에는 높이 약 5m의 천수대가 남아 있으며, 성의 내외부에서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 성벽은 외성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는 내탁식으로 하고 내성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식으로 축조하였으며, 기울기는 지면에서 60도 내외이다.

 

 

▲ 백로가 노니는 들판 뒤편 산 정상부에 서생포왜성이 보인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많은 왜성들이 임진왜란이 한참 진행중인 상황에 지어졌는데 서생포왜성만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해서 임진왜란 초기에 지어졌다. 조선침략의 거점으로 사용된 것이다. 1594년에 사명대사와 가토기요마사가 4번에 걸친 회담을 진행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조선을 장악하던 왜가 이순신과 권율 등에게 패배하면서 쉽지 않은 전쟁이 이어지자 강화를 원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또한 남의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하기보다는 대충 강화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우리나라를 뺀 명과 왜가 강화회담을 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사명대사를 서생포왜성에 보내 회담을 진행한 것이다.

 

 

 

 

 서생포왜성은 조선 침략의 거점이 되어서 침략 초기의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철수 할 때도 최후의 거점으로의 역할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서생포왜성은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의 동첨절제사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53명의 충신들을 위해 창표당을 세웠는데 일제시대에 파괴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서생포왜성이 다른 곳에 있는 왜성들에 비해서 규모도 크고 위치도 좋아서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가장 큰 것 같아. 왜성의 복원과 함께 창표당도 복원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픈 역사도 역사이지 않은가.

 


 

 

 서생포 왜성의 자료 사진을 봤을 때는 무너져서 약간의 돌담 흔적만 남은 성이어서 보러 올라갈까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올라가고 나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견고한 성벽이 잘 남아있고 독특한 성의 구조와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과 진하해수욕장의 풍경이 좋다. 이 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 벚꽃나무여서 봄에는 피크닉 온 사람들이 흔날리는 벚꽃나무 아래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까먹는다고 한다.


 

 

 

 산정부 중심곽. 천수대. 이 소곽은 내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동측과 서측에는 엇물림형 출입구와 소곽을 배치하였고 남측과 북측은 석루를 둘렀다. 북서 모퉁이에는 천수대로 짐작되는 남북 18m, 동서 17m, 높이 5m의 석단이 놓여 있으며, 축성 당시 상부에는 3층에서 5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격용 소곽. 이 소곽은 배후의 주곽을 방어하고, 군대의 출진시 그 움직임을 은폐, 보호함으로써 안전한 출격을 도모하기 위한 시설이다. 성을 처음 쌓은 임진왜란기에는 남측과 북측에 출입구가 설치되어 출격용 소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정유재란기인 1598년 정월의 울산왜성 전투를 전후하여 2개의 출입구를 모두 폐쇄함에 따라 그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60도 기울어진 성벽만을 확실히 일본의 성 느낌이 난다. 각 구조마다 그림과 글로 설명이 되어있어서 전체적인 성을 이해하기에 좋았다.


 돌출형 소곽. 남측으로 돌출되어 축조된 이 소곽의 주위에는 3개의 출입구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측으로 열린 되형 출입구는 성밖으로 나가는 내성의 부출입구이며, 동측 출입구는 하단의 주출입구로 이어지고 북측의 직진형 출입구는 산정부로 연결된다. 이러한 지점에 위치한 이 소곽은 규모는 작지만 3개의 출입구를 동시에 수비, 통제하며 자체적으로 독립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기능을 지닌다.

 

 내성 주출입구. 이 성문은 내성으로 들어가는 주출입구로 성벽의 남아있는 형태로 볼 때 축성 당시에는 상부에 문루가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을 들어서면 정면과 우측면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진입로를 굴절시킴으로써 성 내부를 볼 수 없게 하고, 유사시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내성은 수개소의 소곽으로 구성되는데 각 소곽의 전면에는 전부 이와 같은 출입시설을 설치하였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서생포왜성성문에 대한 설명 중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서문은 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군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보면 이 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서생포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하여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일출도 못 본 마당에 비가 안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진해해수욕장 앞 번화한 건물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1500년대의 조선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을 것이다. 그 슬픔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마음 속 깊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교훈은 300년동안 지속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3백년 뒤에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우리는 자신 할 수 있을까...


 



 

 

  여행 정보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초입에 문화관광 해설사 사무실에 있어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해설사가 항상 상주하는 것은 아니므로 일행이 많다면 울주군 측에 문의(052-229-7000)하는 것이 좋다.

생각보다 가파른 길을 걸어야하기에 어르신들에게는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