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대를 바라보다

[연극] 풀포러브 - 때깔 다른 연극 시리즈의 시작, 무대가 좋다의 개막작 풀 포 러브

연극 풀포러브

 때깔 다른 연극 시리즈의 시작, 무대가 좋다의 개막작 풀 포 러브

 

 [무대가 좋다]시리즈의 개막작인 풀 포 러브는 굉장히 보고 싶었던 연극이었다. 풀 포 러브에 대한 평을 본 적도 없었고 전에 공연되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는데 이 연극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포스터와 배우들 때문이었다. 배우들이 예쁘고 잘 생겨서 이기때문이겠지만 포스터가 단순한데 매력적이다. 요즘들어 유명 연예인이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배우의 입장에서는 연기의 폭을 넓히고 공연 관계자들에게는 티켓의 판매를 늘리며 관객들은 그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종종 이것이 단지 티켓의 판매를 늘리는 효과만을 가질 뿐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환영한다. 도전하지 않으면 발전도 없을테니까. <클로저>와 <나는 너다>도 보고 싶다.

 

내가 본 공연의 캐스팅은 조동혁, 김효진, 남명렬, 박해수였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도 보통 공연을 보고 나서 바로 그 공연을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근데 이 공연을 본 후에 다른 배우들의 무대는 어떨지 궁금해서 다시 보고 싶어졌다. 이야기와 구성은 흥미롭게 짜여져있는데 에디와 메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극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그들의 연기력이 절대적인 작품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다른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 모습도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공연을 본 후에 구글에서 해외에서 공연 된 풀 포 러브의 이미지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영어로 씨부리는 그들의 연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고, 확실한 건 대학로에서 하고 있는 이 연극이 가장 색감과 무대 구조등이 좋고 배우들도 가장 멋지다는 것이다. 때깔난다. 그래서 연기력 논란에 더 큰 아쉬움이 남는다. 또 <클로저>가 1차 티켓 오픈이 2분만에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본 <풀 포 러브>는 1/3의 좌석이 비어있어서 안타까웠다. 이래서는 배우들이 더 힘을 내서 연기해 공연이 진행될 수록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기 힘들 것 같았다.

 

 

<풀포러브>에서는 유난히 빨간색이 눈에 많이 띈다(내 눈에만 그럴수도...). 메이의 옷도 그렇고 창틀도 문틀도 액자도 그렇다. 재밌는 것은 창틀은 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문틀도 문을 위해 존재하며 액자도 사진이 없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붉은 색의 물건들은 각자 자기자신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메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에디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결코 그녀는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없다. 문 없는 문틀이 될 수 없듯이 에디 없는 자신이 될 수 없는 메이인 것이다. (붉은 티셔츠만을 입고 있었을 때는 그런데로 견딜 수 있었지만 에디가 나타나고 다시 한번 자신은 혼자서 독립할 수 없는 인간임이 운명처럼 드러나듯이 붉은 드레스로 온 몸을 감싼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려도 순식간에 동서를, 지옥과 천국을, 짜장면과 짬뽕 사이를 오간다. 우습게도 마음은 짬짜면처럼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풀포러브>에서 메이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선택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만 같다.

 <풀포러브>는 우주의 빅뱅이후 에디家와 메이家는 항상 그랬다는 듯 반복되어지는 운명을 보여준다. 에디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에디는 메이와 마돈나 사이를 오가고, 메이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메이는 한 남자에게 삶의 전체를 휘어잡힌 채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우습게도 그들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운명이라는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같아 보인다.

 

노인이 에디와 메이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원인의 제공자이지만 그가 없었으면 그 둘의 만남이, 아니 존재가 없었을거다. 그래서일까? 원망의 대상이어야 할 노인은 에디와 메이의 삶에 수시로 나타나 조언을 하고 위로를 건넨다. 각자의 어미를 닮은, 자신 때문에 어미를 잃은 두 사람에게 노인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

 모텔은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떠돌이들의 공간으로 항상 불안한 공기가 멤돈다. 그 안에서 극의 모든 모습이 보여지면서 이 공간이 에디와 메이 사이의 불안함을 대변한다. 오랜 시간 트럭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았던 그들은 어떠면 조금 나아진 걸까? 그들의 다음 모습은 와이오밍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불현듯 그건 아닐꺼라는 걸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