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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바라보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우리는 모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있다

 

 

 요즘들어 부쩍 연희단거리패의 공연을 자주 보게된다. 공연을 선택하기 위한 시간이 귀찮아서이기도 하다. 극단 이름만 보고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바로 보러 갈 수 있는 극단들이 있다.

그게 바로 연희단거리패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그렇게 공연정보 하나없이 극단 이름만 보고 갔다.

 

 제목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내용은 모르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이었다.

무대에 많이 올려지지만 테네시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유리 동물원>을 희곡으로 읽었을 뿐이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그렇고 <유리 동물원>도 그렇고 그는 흥미 위주의 소재를 가져오기 보다는 사람의 심리에 침착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듯.

 

사실 난 초반에 조금 지루한 느낌이 있었다. 중반부터 굉장히 집중하게 되었다. 뭐... 내가 좀 졸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근데 알고보니 원작은 4시간짜리라고. 연희단거리패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2시간을 조금 넘기는  공연시간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절반을 압축한 것이었는데도 스토리 전개가 빠르지는 않다. 이건 원작이 가지는 특징이고 현대극으로 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부분인 듯. 아니 애초에 스토리 전개에 이야기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감정표현에 이 이야기의 힘이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다음에 묘지를 지나면 천국이라는 엘리지안 필드가 나온다.

 

 블랑쉐에게 동생의 집은 천국이다.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도피처다.

집안 남자들의 욕망은 큰 부자였던 자매의 집안을 몰락시킨다.

그리고 블랑쉐는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살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때부터 블랑쉐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이다. 2년간의 여관생활도 그녀는 현실을 직시해서 먹고살기 위한 행동이 아닌

환상에 사로잡혀서 살아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현실을 직시하게 되어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떠났는지 모른다.

 

 블랑쉐의 욕망은 스탠리의 욕망과는 대치되는 면이 강하다.

그 사이에 그저 평범하지만 가족을 아끼는 삶을 살고자 하는 스텔라의 욕망도 자리한다.  

각자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합의점을 찾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당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온전히 좌절당해야 하는 욕망도 생겨난다.

 

 

 

천경자의 그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모습이지만 그 겉모습으로는 집 안에서, 욕망의 전차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 지 알 수가 없다.

귀족 집안 사람같은 옷과 행동거지를 보이는 블랑쉐의 삶이 사실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극의 초반에는 마치 더빙된 오래된 외화시리즈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어색한 느낌도 곧 사라지고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게 된다.

온전히 스텔라가 되어버린 듯한 배우 김하영은 멍한 눈동자로 뚝뚝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