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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바라보다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제목에서 받은 느낌은 진부함이었다. 연극도 보기 전에 제목에서 사용된 단어들에서 오는 거부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니. 하지만 연극을 보기 전에는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심지어 그 이별이라는 것이 가족의 죽음인데도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조소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극을 본 후 이미 정해진 이별이라면 슬픔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아름답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작품은 드라마를 연극으로 옮긴 작품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연극으로 만든 작품들은 본 적이 있지만 드라마를 연극으로 만든 작품은 처음 보았다. 드라마가 원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드라마에 나올 법한 배우들이 나와서 일까. 연극이 아닌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연출되어진 방법도 드라마 같았다. 갈등이나 감정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그것을 폭발시키고 암전이 된다. 이 장면을 보면 드라마 1회분의 하이라이트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된다. 그렇게 잔잔한 감정 곡선을 이루다가 암전이 되기 전 절정에 이르는 방식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연극이 텔레비전 드라마 일 수는 없지 않은가. 텔레비전 드라마는 20시간에 가까운 여유를 가지며 1시간의 방송분이 끝나면 다음 방송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연극은 2시간 안에 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연극은 충분히 감정을 끌어 올리고 감정의 곡선이 끊이지 않게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같은 1회분의 결말을 알리는 암전이 반복되면서 감정이 충분이 고조되지 못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드라마가 원작이고 그 원작자가 노희경이라면 적절한 수정이 힘들 것 같기는 하다.  

 

 

 반면 연극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을 잘 이용한 부분들도 있다. 슬픈 장면에서 그 감정이 최고조일 때 무대 전체에 푸른 조명을 사용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색이 들어간 조명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사용되지 못하지만 연극에서는 조명이 많이 사용된다. 슬픈 장면들에서 반복되어 사용된 푸른색은 슬픔을 의미하는 색으로 사용되어져 왔는데 우울함을 이야기할 때 blue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란 조명이 무대 전체를 사용되었을 때가 이 극이 슬픔의 절정에 달한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조명의 사용은 인희가 피를 토하는 장면에서 옆에 있는 나무의 나뭇잎들이 붉게 변하는 장면에서도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인희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철조망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조명을 침대에 누워있는 인희의 몸 위에 만들어낸다. 마치 아무리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렸음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하지만 인희의 죽음이 파란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새로운 희망의 초록이라고 말하듯이 마지막 장면 부분에서는 초록색 조명과 무대가 사용된다. 사용되어진 음악 ‧ 음향에 있어서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슬픈 장면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슬픈 음악들을 사용했고 인희의 수술 장면등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면이 정말 이 연극이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인위적이라고 사용되지 않는 것을 연극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용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 연극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사는 윤박사가 인희의 남편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형 선고가 주어진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의 대가로 받는 게 있어요. 건강한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는 삶의 정리 기간 같은 거 말이예요.’ 이 말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고 인희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이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이유다. 인희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병원을 그만두려하는 월급쟁이 의사 남편, 방황하는 삼수생 아들, 갓 직장을 다니게 되어 가족들을 신경쓰지 않는 딸, 말썽쟁이 동생이 있는 여성이다. 그녀에게 자궁암 말기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그 후의 관계들과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설정을 들으면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야기들로 단련되어져 온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당연하게 예상되어지는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의도가 사람들을 울리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놓치기 쉬운 것이 이 연극의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인희가 죽고 난 후를 준비하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죽어가고 있는 인희에게 집중할 뿐이다. 인희는 자신이 죽고 난 후의 일들을 준비한다. 딸에게 음식을 가르치고, 동생 부부에게 돈을 주고, 지어지고 있던 집의 공사를 마무리하게 한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자신의 죽음 이후 감당되어지지 않는 존재임을 알기에 목을 조르기까지 한다. 화장을 원했던 그녀가 남은 가족들이 방황하지 않도록 묘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리곤 자신의 삶도 정리한다. 내게 그것이 가장 깊게 다가왔던 것은 남편에게 자신이 죽으면 언제 생각 날 것 같냐고 묻는 장면이었다. 남편은 한 문장씩 인희의 물음에 답하고 인희는 ‘또’라고 묻는다. 인희는 자신이 잊혀질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어떤 사람이 그러겠는가. 그렇게 인희는 담담히 가족과 스스로에게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 삶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면, 아쉬움을 느낄 틈도 없겠지만 우습게도 하늘나라에 가서도 억울 할 것 같다.

 

 

 인희처럼 내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인희는 정말 침착하게 삶을 정리해 나간다. 내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그런 아쉬움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만들기보다는 진행되어져 온 일상과 일들을 이어가는 모습이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내가 인희의 상황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또 어땠을까. 가장 이해 공감되는 모습은 인희이 아들인 정수였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고 인희에게 당당히 보여 줄 것이 없는 자신이 미운 정수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뭔가 해 주고 싶고 기쁘게 해주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자신이 얼마나 싫어질까. 그리고 그 동안 실망시켰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 질 것만 같다.

 

 연극을 보기 전 진부할 거라 생각했고, 솔직히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건 내 공감능력이 부족해서거나 연극열전의 레퍼토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또 아쉬운 점은 연출가의 말에 의하면 드라마에는 없는, 인희가 죽고 난 후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에필로그 장면이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연극에서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무대세트에서 주무대가 브라운관인 배우들과 연극 배우들의 조금은 다른 연기 스타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된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