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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사이를 지나

[소설] 유랑자 -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유랑하다.

소설 유랑자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유랑하다

 

 <유랑자>는 환생에 대한 이야기다. 내게 환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린다는 점에서 천국과 다름없는 죽음 후의 관념이었다. 전생의 삶에 의해 지금이 있는 거라면 그건 너무 운명적론이어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랑자>를 읽은 후 환생은 사랑이나 꿈처럼 생각만으로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이 되어버렸고 환생에 관한 책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예수는 유랑자였다. 그에게는 정해진 거처도 근거지도 없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거처였고, 근거지였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동했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기도 했다. 정지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다.1

 

'나'는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새엄마 또한 베트남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국을 오가며 자랐으며 종군기자로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빈다. 그리고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어 한국을 오간다. 내면의 문제는 제쳐두고 외적인 면만을 보아도 '나'라는 캐릭터는 간단치 않다. '나'의 간단치 않은 정체성이 이 이야기를 대표한다. <유랑자>는 1인칭 시점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다. 강희에 의해 케이라 언급되는 '나'의 시점이 어느새 이브라힘의 전생인 이집트 와지르 서기관으로 가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현재와 이브라힘을 만났던 과거, 이브라힘과 케이의 전생인 십자군 전쟁시기 그리고 예수를 만났던 시기를 오고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것들은 서로 맞물려가면서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유랑자>를 중반 가까이 읽어나가면서 내가 이 소설을 미스테리로 만들어가고 있기도 했다. 이브라힘과 케이가 예수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있음은 소설 초반에 등장한다. 그것이 서기 천년 경의 십자군 전쟁 당시 전생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군 전쟁의 전생인 예수 시절이 이야기되면서 나는 이 부분에서도 케이와 이브라힘의 인연이 닿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의 친어머니는 무당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매개자인 것이다. 예수 또한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케이가 예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전생의 전생에 예수의 연인이었던 이브라힘이 케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케이와 이브라힘의 전생에서 케이가 이브라힘을 살해하게 된 장면이 또 다른 구절과 겹치어 떠오르게 된다. 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주님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게 참혹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2  이 문장 앞에는 유대교가 그리스도교의 어머니지만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케이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상처와 분노를 가지게 했고 이것이 드러났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 이건 말이 안 된다. 케이가 전생에 버림을 받고 후생에 살인을 해야하는데 이건 전후관계가 맞지 않는데다가 이브라힘과 케이의 친어머니가 동시대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소설을 읽으며 만들어내고 있던 미스테리는 막을 내렸다. 심지어 초반에는 케이가 예수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영화 <맨 프럼 어스>를 떠올린 것이다. 장수하는 대신 환생으로 바꾸어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유랑자>는 카톨릭교, 이슬람교, 불교에서 샤머니즘까지 그 안의 내용들을 가져와 환생이라는 주제로 관통시킨다.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가져오면서도 산만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단지 거슬렸던 것은 굳이 이렇게 구태의연한 설명들, 가르치려고 혹은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문장들이 필요할까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의 소년 알리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내'가 본 장면들을 넘어서서 영국에서 이라크로 다시 런던으로 가서 학교를 다닌다는 이야기등이 이 소설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병원에서 사망한 부분에서, 스코트 니어링이 떠올랐다고 서술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여놓는다. 이런 식의 흐름이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열거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내용들은 흥미롭지만 불편하다. 또 이런식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 영역본 편집자 에반스 웬츠는 2판 서문에서...' 만약 실제로 <티베트 사자의 서>에 그가 언급한 내용이 없다면 더욱 소설같이 느껴지겠지만 분명 찾아보면 있을 것만같다. 이건 소설이라구. 내게 있어 이런 부분이 소설에서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다가왔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환생이 만들어진 이유에 대한 케이와 강희의 대화였다. 그 부분을 읽고 환생이라는 것이 실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납득해버렸다. 소설이면서 왜 사람을 납득시켜버리는 것인가. 결국 이것으로 난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버리게 되어버린 거다. 작가의 이야기에 넘어가버리고 만것이다. 생식보다 환생!!! <유랑자>에서 예수는 메시아라기 보다는 무당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무당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껴 공감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당을 찾는다. 소설 안에서도 강희와 케이의 친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그것은 많이 비추어진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드러난다.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그것은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몰랐다. 오직 나만이 느꼈다. 누군가가 내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기적이었다. 예수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기적의 모습으로.3  

 

 정찬의 장편소설 <유랑자>는 재밌다. 아무래도 정찬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책갈피

 

인간의 행위 가운데 전쟁만큼 기이한 행위를 나는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p.19

 

형상은 영원을 견디지 못한다. 신이 영원한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육체라는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형상은 우주의 한 파편이다. 우주의 한 파편일 뿐인 인간에게 불멸은 헛된 꿈이다. p.35

 

"젊은 목수였습니다. 초라한 여인의 아들이었고, 남루한 유랑자였습니다. 그는 머물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걸었습니다. 사람들을 찾아 걸었고, 사람들에게 쫓겨 걸었습니다. 그의 발은 늘 흙투성이였습니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나무 위였습니다. 나무 위에서 그는 못 박혀 죽었습니다." p.50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주님의 땅을 찾기 위한 성스럽고 고귀한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랑자였습니다. 유랑자에게는 한 뼘의 땅도 필요 없습니다. 그는 죽을 때조차 땅 위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그의 땅을 찾겠다면서 쳐들어왔습니다. p.51

 

무함마드는 지각의 능력이 닿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원인을 탐구하지 말라고 했다. 계속 탐구하면 절망에 빠진다는 이유에서였다. p.75

 

고통 앞에서 나는 무방비상태였다. 고통의 실체는 너무나 명료했다. 그 앞에서 어떤 정신도, 어떤 지식도 무익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삶의 기억도 명료한 고통의 실체 앞에서는 불에 탄 나무토막으로 변했다. 고통은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순식간에, 가차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을 느끼는 것 외에는. p.97

 

불교 포교사에게서 전해들은 붓다의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붓다는 진정한 앎의 첫번째 단계가 흘러간 날들에 자신이 잠시 머물렀던 무수한 생을 기억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해서라는 것이다. 붓다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앎의 첫 단계조차 이루지 못한 채 한 존재 상태에서 다른 존재 상태로 끝없는 유랑을 하고 있다. p.111

 

"알고 싶은 어떤 것을 가장 확실히 아는 방법은 그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가장 확실히 알려면 죽음을 체험하면 됩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죽음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신이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현상과 법칙을 알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나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p.135

 

환생사상의 가치관은 육체가 성장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영혼의 성장에도 수많은 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환생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환생이라는 '존재의 유랑'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존재의 완성이고 구원이라면, 신의 역할과 충돌하게 된다. p.137

 

"무巫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그리워하는 세계예요. 죽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죽은 자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죽음을 그리워한다구요?"

"무속은 본래 삶의 세계인 이승을 부정한 곳으로 봐요. 죽음의 세계는 맑고 깨끗한 세계로 인식하고요. 그러니 죽음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지요. p.158

 

"살면서 겪는 고통들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주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고통의 근원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에 묶여버려요. 난 고통에 묶이는 게 싫었어요.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고통의 근원을 알 필요가 있었어요." p.217

 

신비주의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신과의 합일이다. 신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자아를 버려야만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신비주의자들에게 자아는 나와 타인, 나와 세계, 나와 신을 구별하는 존재이다. 자아를 버리면 나와 타인이 하나가 된다.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되며, 나와 신이 하나가 된다. p.262

 

  1. 116쪽
  2. 18쪽
  3. 106쪽